어느 정도 외교를 정상궤도에 올려놓은 윤 대통령이라면 이젠 시선을 안으로 돌릴 필요가 있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청계천 상가에서 아널드 쇤베르크의 음반을 어렵사리 구했다는 일화가 뒷받침하듯 청소년 백남준은 그곳에서 작가적 창의력과 예술적 비전을 오롯이 키워왔을 것이다.
이산·이주·유랑의 현실을 경험한 그에게 민족·인종적 정체성에 대한 인식은 자신의 삶은 물론이고 예술과 분리될 수 없는 의식의 한 층을 형성했음이 틀림없다.뿐만 아니라 그는 예술과 과학.비디오아트 문 연 ‘세계의 보물 창신동 기념관 폐관 소식 충격 서린동 생가보다 상징성 더 커시론 창신동 백남준기념관의 장소적 의미는 그것이 큰 대문의 부잣집이라서가 아니라 그곳에 백남준이 1936년 다섯 살부터 열여덟 살까지 14년간 살았다는 점에 있다.
백남준은 어려서 고국을 떠나 홍콩·일본·독일을 거쳐 미국으로 이주하고 국제적인 창작·전시 활동으로 세계적인 ‘남준 팩이 됐다.충남 홍성 이응로의 집(2011년)에 이어 세종시는 내년에 장욱진기념관 개관을 앞두고 있어 기대를 모은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문화적 아방가르드로서 세계 미술사의 아랫목을 차지한다.
나를 죽였다정구왕은 배신자 얼굴 깠다스파이 본능에 만난 리계향‘답정너 수사 모멸 준 수사관조국은 내게 눈가리개 씌웠다北탈출 요원에 새긴 주홍글씨/.김홍희 백남준문화재단 이사장·전 서울시립미술관장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것이 소원이야.
강원도 양구 군립 박수근미술관(2002년 개관).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설치(1995)를 주도하면서 한국의 미술문화 선진화에 크게 기여했다.
오히려 그는 한국에서 저평가돼 있다.우리는 유명인이 태어났거나 잠시 살았거나 학교에 다녔거나 하는 연고를 십분 살려 미술관이나 기념관을 짓고 마을 브랜드로 키워가는 사례를 목격하고 있다.